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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미술을 다룬 영화 '고야의 유령' ( 종교재판, 해석, 예술 정치)

by belicia 2025. 7. 8.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은 종교와 권력, 혁명과 개혁의 급변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은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인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를 중심에 두고 예술과 정치, 종교와 인간성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단지 고야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가 아니라, 그의 회화 세계를 영화적 언어로 재해석한 하나의 철학적 텍스트입니다. 특히 미술 전공자나 역사 애호가라면 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시각적 상징성과 역사적 아이러니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야의 그림은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초월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본 글에서는 고야의 작품과 영화적 장면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종교재판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인물의 심리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예술가 고야가 어떤 태도로 시대를 기록했는지를 중심으로 상세히 분석하겠습니다.

 

영화 '고야의 유령' 포스터 - 세 주인공의 모습
영화 '고야의 유령' 포스터

프란시스코 고야의 시선, 작품으로 읽는 시대

고야는 스페인 궁정에서 활동한 공식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항상 현실에 대한 냉소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고야는 종교재판과 프랑스혁명의 한가운데서도 침묵을 지키며 오직 그림을 통해 시대를 기록합니다. 이 모습은 실제 그의 삶과 매우 유사합니다. 고야의 판화 시리즈인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전쟁의 참상(Los Desastres de la Guerra)’, 그리고 말년에 제작한 ‘검은 회화(Pinturas Negras)’는 모두 당대 사회의 부조리, 인간의 폭력성, 종교의 위선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 속 장면 중 한 여성의 고문과 수용소 장면은, 실제 고야의 ‘광기의 병원’이나 ‘밧줄에 매달린 인간 군상’과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사실 묘사 그 이상으로, 예술가가 현실의 비극을 어떻게 전유하고 변환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미술학도라면 이 장면들을 분석함으로써 회화의 시각 언어와 영화적 미장센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야는 명암의 극단적 대비, 뭉개진 인물 묘사, 기괴한 상상 속 존재들을 통해 시대의 공포를 표현했고, 영화는 이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합니다. 고야의 작품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인류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이며, 그 정신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짙게 배어 있습니다.

종교재판의 이면, 인간성과 위선의 충돌

‘고야의 유령’의 중심축은 스페인 종교재판이며, 이를 통해 감독은 권위주의와 도덕적 위선이 개인에게 얼마나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나시오 신부는 처음에는 가톨릭의 엄격한 윤리와 교리를 수호하는 수호자처럼 등장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점령기에 세속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급변합니다. 이는 권력 앞에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과 기회주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종교와 정치가 결탁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문을 정당화하고,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 강압과 조작을 일삼던 이나시오는 결국 권력의 변화 속에서 자신도 피의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아이러니는 단순한 캐릭터의 몰락이 아니라, 역사의 반복성과 권위적 체계의 자기 붕괴를 상징합니다. 영화에서 희생자인 알리시아의 인생이 철저히 파괴되는 모습은, 권력 아래에서 개인이 어떻게 철저히 무시되고 도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사입니다. 미술학도나 인문학 전공자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술은 과연 무엇을 고발해야 하는가’, ‘예술가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야는 이러한 현실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회화를 통해 조용히 모든 것을 기록합니다. 이는 침묵이 반드시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예술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증언임을 의미합니다. 고야의 침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거운 울림을 전달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술과 권력의 긴장, 고야의 회화로 본 메시지

예술과 권력은 항상 긴장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고야는 이 양극단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회화라는 무기로 시대를 관찰했습니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고야의 노년은 완전히 침묵한 상태이며, 이 시기의 그림은 색채가 사라지고 형태는 왜곡되며 어두운 기운이 화면 전체를 덮습니다. 이는 그가 제작한 ‘검은 회화(Pinturas Negras)’와 동일한 분위기를 지닙니다. 벽에 직접 그려졌던 이 회화들은 당시 어떠한 설명이나 판매 목적도 없이 만들어졌으며, 고야 개인의 내면과 시대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 시기의 고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장면마다 등장하는 그의 스케치와 드로잉은 곧 내면의 외침을 상징합니다. 미술학도는 이 장면들을 분석하면서 예술가가 역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를 실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이상화된 초상화가 아닌, 추악한 현실을 담아낸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기록이라는 메시지가 영화에 짙게 깔려 있으며, 이는 고야의 철학과도 일치합니다. 또한, 영화는 ‘고야의 유령’이라는 제목처럼, 고야가 직접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가 모든 장면을 지배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영화 전반에서 주제적·심리적 지표로 기능하며, 권력의 폭력성과 인간의 광기를 구체화하는 시각적 도구로 활용됩니다. 이는 단순한 미술적 재현을 넘어서, 예술이 역사 서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고야의 유령’은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예술이 어떻게 진실을 기록하고, 권력에 맞서고,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가를 질문하는 철학적 영화입니다. 미술학도와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역사 애호가 모두에게 이 영화는 단지 시청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입니다. 고야처럼, 우리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고야가 남긴 침묵의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분명 새로운 시선으로 예술과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